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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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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는 마자파힛 제국의 네 번째 군주이자, 자야네가라 사후 어머니 가야트리의 섭정 아래 1329년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녀는 자야네가라의 이복 동생들을 가두는 정책에 반대하며, 가자 마다를 등용하여 제국 확장을 이끌었다. 1331년 반란 진압을 위해 직접 군대를 지휘했으며, 가자 마다의 팔라파 맹세 이후 페쟁, 발리, 스리위자야 등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1350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퇴위하고 아들 하얌 우루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사후 파르바티 여신으로 신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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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
기본 정보
마자파히트 여제의 트리부와노퉁가데위 조각상, 파르바티로 묘사됨
마자파히트 여제의 트리부와노퉁가데위 조각상, 파르바티로 묘사됨
왕조라자사 왕조
출생명디야 티야
즉위명스리 트리부와노퉁가데위 마하라자사 자야위슈누와르다니
즉위명 (자바어)ꦯꦿꦶꦡꦿꦶꦨ꧀ꦲꦸꦮꦟꦡꦸꦁꦓꦢꦺꦮꦶ ꦩꦲꦬꦗꦯꦗꦪꦮꦶꦯ꧀ꦟꦸꦮꦂꦝꦟꦶ
즉위명 (의미)비슈누의 영광이 빛나는 세 세계의 고귀한 여신
칭호마자파히트의 마하라니, 브레 카후리판
종교힌두교
통치
재위1328년 – 1350년
이전 통치자자야네가라
다음 통치자하얌 우루크
임기1309년 – 1328년, 1350년 – 기원후 1372년 – 1375년경
생애
출생1309년 이전
사망기원후 1372년 – 1375년경
매장지마자파히트 왕국, 팡기, 판타라푸라
가족
아버지케르타라자사 자야와르다나 디야 위자야 왕
어머니라자파트니 라젠드라 디야 데위 가야트리
배우자케르타와르다나 디야 차크라다라, 투마펠의 왕자
자녀라자사나가라 디야 하얌 우루크 왕
라자사두테스와리 디야 네르타자, 파장의 공주
후계자 (카후리판)하얌 우루크
비크라마와르다나

2. 초기 생애

겐젱 II 비문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디야 탸였다.[1] 그녀는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한 케르타라자사 자야와르다나 왕과 그의 정실 부인인 디야 가야트리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었다. 어머니 가야트리는 ''라자파트니''라는 칭호를 지녔으며, 싱가사리 왕국의 마지막 왕 케르타나가라의 딸이었다. 이로써 탸는 라자사 왕조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그녀는 위자야 왕의 장녀였으며,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여동생 디야 위야트가 있었다. 이복 오빠로는 인드레스와리의 아들인 자야네가라가 있었다. 나가라크레타가마에 따르면, 1309년 아버지 케르타라자사 왕이 사망하고 이복 오빠 자야네가라가 왕위를 계승한 후, 그녀는 카후리판의 ''브레''("카후리판의 공주", 현재의 시도아르조 지역)라는 칭호를 받았다.

2. 1. 가계와 배경

겐젱 II 비문에 따르면 트리부와나의 본명은 디야 탸였다.[1] 그녀는 마자파힛 제국을 건국한 케르타라자사 자야와르다나 왕과 그의 정실 부인인 디야 가야트리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이었다. 어머니 가야트리는 ''라자파트니''라는 칭호를 가졌다. 아버지 케르타라자사 왕은 싱가사리 왕국의 창건자 켄 아록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가야트리 왕비는 싱가사리 왕국의 마지막 왕 케르타나가라의 막내딸로 아누사파티의 혈통을 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탸는 중요한 라자사 왕조의 일원이 되었다.

탸는 위자야 왕의 장녀였으며,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여동생으로 디야 위야트가 있었다. 이복 오빠로는 인드레스와리의 아들인 자야네가라가 있었다. 나가라크레타가마 48장 1절에 따르면, 1309년 아버지 케르타라자사 왕이 사망한 후 이복 오빠 자야네가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후 탸와 여동생 위야트는 ''파두카 바타라''라는 칭호를 얻고 단순히 ''브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탸는 카후리판의 ''브레''("카후리판의 공주", 현재의 시도아르조 지역)였고, 여동생 위야트는 다하의 ''브레''("다하의 공주", 현재의 케디리)였다. 두 자매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하여 자바인들이 숭배하는 힌두 여신 라티 쌍둥이에 비유되기도 했다.

파라라톤에 따르면, 자야네가라 왕은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탸와 위야트를 아내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자바 전통에서는 이복 남매 간의 결혼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태후 가야트리가 이끄는 왕실 원로 회의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자야네가라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경쟁자들이 두 공주에게 구혼하는 것을 막아 자신의 왕위 계승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자야네가라는 탸와 위야트를 궁궐 내 여성들의 거처인 ''카푸트렌''에 가두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이 감금은 수년간 지속되었고, 두 공주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이는 어머니 가야트리 태후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그녀는 딸들을 감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애썼다.

2. 2. 자야네가라의 감금

파라라톤에 따르면, 자야네가라 왕은 자신의 이복 여동생들인 트리부와나와 디야 위야트를 배우자로 삼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바 전통에서는 이복 남매 간의 결혼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태후 가야트리가 이끄는 왕실 원로 회의는 왕의 뜻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자야네가라의 정확한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경쟁자들이 이복 여동생들에게 구혼하는 것을 막아 자신의 왕위 계승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자야네가라는 트리부와나와 위야트를 궁궐 내 여성들의 거처인 ''카푸트렌''에 가두었다. 그는 두 공주를 삼엄하게 감시되는 구역에 감금하여 궁정의 공적인 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구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감금 조치는 수년간 이어졌고, 그 결과 두 공주는 자바 전통에서 결혼 적령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어머니인 태후 가야트리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녀는 딸들을 감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3. 혼인

1328년 자야네가라 국왕이 사망하자, 두 공주(트리부와나와 그녀의 여동생)를 결혼시키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 경쟁에서 귀족 디야 차크라다라와 디야 쿠다메르타가 승리했다. 트리부와나는 디야 차크라다라와 혼인했는데, 그는 후에 뚜마펠의 "공작"인 케르타와르다나 섭정공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녀의 여동생은 디야 쿠다메르타와 결혼했으며, 그는 후에 벵케르의 "공작"인 비자야라자사 왕자로 알려졌다.

남편 차크라다라는 다섯 선정불 중 하나인 보생불에 비유되었으며, 나그라케르타가마의 저자는 트리부와나와 차크라다라 부부를 독실한 불교도 부부라고 칭찬했다. 부부는 두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1334년에 태어난 하얌 우루크로, 훗날 라자사나가라 국왕이 된다. 막내는 디야 네르타자였다. 하얌 우루크는 왕위에 오르기 전 어머니의 직위인 '브레' 카후리판을 물려받았다. 그는 후궁 소생의 비자야라자사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디야 네르타자는 '와르다나두히테스와리' 또는 '라자사두히테스와리'[2]("케르타와르다나의 딸" 또는 "라자사 가문의 딸"이라는 의미)라고도 불렸으며, '브레' 파장("파장의 공작부인")이 되었다. 한편, 차크라다라에게는 디야 소토르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트리부와나의 의붓아들이었다.

4. 재위

1328년 자야네가라가 살해된 후, 트리부와나는 어머니 가야트리 라자파트니의 명령으로 1329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가야트리는 이미 수녀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직접 통치하는 대신 딸을 즉위시켰다. 트리부와나는 "Tribhuwanottunggadewi Jayawishnuwardhani|트리부와노퉁가데위 자야위슈누와르다니jav"라는 즉위명으로 통치했으며, 이는 "비슈누의 영광이 빛나는 세 개의 세계의 고귀한 여신"을 의미한다. 그녀는 남편 크리타와르다나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3]

그녀의 재위 기간 동안 마자파힛 제국은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1331년에는 사뎅과 케타 지역의 반란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촌 아디티야와르만의 도움을 받았다. 1334년에는 가자 마다를 새로운 마하파티(수상 격)로 임명하였고, 이는 이후 제국 확장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자 마다의 보좌 아래 트리부와나는 제국의 대대적인 확장을 추진하여 1343년 발리 섬 전체를 정복하고, 1347년에는 아디티야와르만을 파견하여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와 멜라유 왕국 잔존 세력을 정복했다. 이러한 확장은 훗날 그녀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얌 우루크 시대에 마자파힛 제국이 황금기를 맞이하는 기반이 되었다.

4. 1. 즉위와 통치

나가라크레타가마 기록에 따르면, 트리부와나는 1328년 자야네가라 왕이 살해된 후, 1329년 어머니 가야트리 라자파트니의 명령으로 왕위에 올랐다. 가야트리는 당시 마자파힛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이자 최고 연장자였으나, 이미 수녀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직접 왕위를 계승하는 대신 딸을 왕위에 앉혔다. 일각에서는 가야트리의 충실한 조언자였던 가자 마다가 자야네가라 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트리부와나는 "Tribhuwanottunggadewi Jayawishnuwardhani|트리부와노퉁가데위 자야위슈누와르다니jav"라는 즉위명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비슈누의 영광이 빛나는 세 개의 세계의 고귀한 여신"을 의미한다. 그녀는 남편 크리타와르다나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으며[3], 훗날 마자파힛 제국의 네 번째 군주가 되는 하얌 우루크의 어머니이다.

1331년, 트리부와나는 사뎅과 케타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촌인 아디티야와르만의 도움을 받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이 결정은 반란 진압군의 지휘권을 두고 가자 마다와 라 켐바르 사이에 벌어진 경쟁을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334년, 트리부와나는 가자 마다를 새로운 Mahapatih|마하파티jav(수상 격)로 임명했다. 가자 마다는 이 자리에서 유명한 팔라파 맹세(Sumpah Palapa|숨파 팔라파jav)를 선언하며 마자파힛의 영향력을 군도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파라라톤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맹세는 취임식에 참석한 조정 관리들을 놀라게 했으며, 특히 그의 경쟁자였던 라 켐바르 등 일부는 이를 비웃었다. 공개적인 모욕에 격분한 가자 마다는 트리부와나의 허가를 받아 라 켐바르와 결투를 벌여 그를 죽이고, 자신의 권위에 반대하는 다른 이들도 처형했다.

수상 가자 마다의 보좌를 받으며 트리부와나는 제국의 대대적인 확장을 추진했다. 1343년 마자파힛은 페쟁 왕국, 달렘 베다훌루 왕국 및 발리 섬 전체를 정복했다. 1347년에는 아디티야와르만이 스리위자야 왕국과 멜라유 왕국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수마트라의 Uparaja|우파라자jav(부왕)로 승격되었다. 마자파힛의 확장은 그녀의 아들 하얌 우루크의 통치 아래 계속되어 서쪽으로는 라무리(현재의 아체)부터 동쪽으로는 와닌(파푸아 오닌 반도)까지 이르렀다.

4. 2. 가자 마다의 등용과 팔라파 맹세

1331년, 트리부와나는 사뎅과 케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섰다. 이때 사촌인 아디티야와르만이 그녀를 도왔다. 이러한 결정은 사뎅 지역 반란 진압을 위한 군 지휘관 자리를 두고 가자 마다와 그의 경쟁자였던 라 켐바르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1334년, 트리부와나는 가자 마다를 새로운 마하파티(Mahapatih, 수상에 해당하는 자바어식 직함)로 임명했다. 이 자리에서 가자 마다는 그의 유명한 팔라파 맹세(Sumpah Palapa)를 선언하며,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력을 말레이 군도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파라라톤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이러한 야심찬 맹세는 취임식에 참석했던 조정 대신들과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특히 가자 마다의 경쟁자였던 라 켐바르를 포함한 일부 관리들은 그의 맹세를 비웃으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는 허풍쟁이라고 조롱했다.

이러한 공개적인 모욕은 가자 마다를 격분시켰다. 그는 트리부와나 여왕의 허가를 받아 라 켐바르와 결투를 벌였고, 결국 라 켐바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후 가자 마다는 자신의 권위에 반대하는 다른 인물들도 처형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3]

4. 3. 제국 확장

1334년, 트리부와나는 가자 마다를 새로운 마하파티(수상에 해당하는 자바식 직함)로 임명했다. 이 자리에서 가자 마다는 그의 유명한 팔라파 맹세를 선언하며 누산타라 전역으로 제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의지를 밝혔다.[3]

수상 가자 마다의 도움으로 트리부와나는 마자파힛 제국의 대대적인 확장을 추진했다. 1343년 마자파힛은 페쟁 왕국, 달렘 베다훌루 및 발리 섬 전체를 정복했다. 이후 1347년에는 아디티야와르만을 파견하여 수마트라에 남아있던 스리위자야 왕국과 멜라유 왕국의 나머지를 정복하도록 했다. 그는 이후 수마트라의 ''우파라자''(하위 왕)로 승진했다. 마자파힛의 확장은 트리부와나의 아들인 하얌 우루크의 통치 아래 계속되어, 서쪽으로는 라무리(현재의 아체), 동쪽으로는 와닌(오닌 반도, 파푸아)까지 이르렀다.

5. 말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품


1350년, 어머니 가야트리 라자팟니가 불교 사원에서 은퇴 생활을 하던 중 사망하자 트리부와나의 통치도 막을 내렸다. 트리부와나는 어머니 라자팟니를 대신하여 마자파힛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망 후 왕위에서 물러나 아들 하얌 우루크에게 왕위를 넘겨주어야 했다.

퇴위 후에도 트리부와나는 완전히 정치에서 손을 뗀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국정에 활발히 참여했다. 아들 하얌 우루크 왕의 통치 시기에 그녀는 두 번째로 카후리판 지역의 통치자인 '브레 카후리판'으로 임명되었다. 카후리판은 당시 마자파힛의 중요한 항구 지역이었다. 또한 그녀는 왕에게 조언을 하는 왕실 원로 회의인 ''바타라 샙타프라부''(Bhattara Saptaprabhujv)의 일원이기도 했다.

트리부와나는 이후 마자파힛의 은퇴 거주지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는 성대한 힌두교식 화장 의식으로 치러졌다. 사후에는 동자바에 있는 림비 사원(Candi Rimbijv)에서 파르바티 여신으로 신격화되었다. 이는 자바의 데바라자 문화에 따른 것으로, 이 문화에서는 군주를 특정 신의 화신으로 여기며, 군주가 죽으면 그 영혼이 해당 신과 하나가 되어 사원에서 숭배받는다고 믿었다.

6. 대중 문화

트리부와나는 4X 비디오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의 다운로드 가능 콘텐츠(DLC)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인도네시아 문명을 이끄는 지도자로 '''기타르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참조

[1] Youtube Tribhuwana Tunggadewi & Rahasia Majapahit Menyatukan Nusantara https://www.youtube.[...] 2023-05-21
[2] 논문 The Names of Hayam Wuruk's Sisters 1968
[3] 서적 The Indianized states of Southeast As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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